한자(漢字)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한 자 한 자 뜻을 살피며 문장을 접하면 문맥을 통해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다른 맛이 있다. 필자가 경남 하동의 청학동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청학동 촌장과 한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분의 말씀에 따르면 한자를 읽고 또 읽고 외우는 과정은 단순히 암송의 과정이 아니라. 그 글귀에 담긴 뜻과 생각들을 우려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 한자가 상징성과 은유성이 아주 강한 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큐티나 성경 암송이 한국 교회만큼 교회에 널리 뿌리내린 교회가 세계에는 없다. 필자의 견해로는 어쩌면 이것이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한자 학습방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식 성경 공부 방법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신학에도 성경의 축자영감설이 한국교회에 의문이나 비판 없이 쉽게 받아지는 교리가 된 것도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한자는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수천 년 동안 한국인의 정신과 생각을 담아 왔던 문자다. 그러나 아타갑게도 한자의 어려움 때문에 단절되었던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마음을 만날 기회를 잃어 버렸다. 따라서 한자를 이해하는 것은 동양인 생각과 우리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동양인의 문화의 틀과 그릇으로 성경의 풍성함 메시지를 새롭게 담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논어의 첫 번째 글자 학(學) 를 공부해 보자.
논어(論語) 는 이렇게 시작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논어의 첫 글귀는 배움에 관해서이고 그 첫자가 바로 學 배울 학: 1)배우다. 2)가르치다. 라는 글자다. 그 어원은 갑골문자에서부터 발견되는 오래된 상형문자다. 짚이나 억새를 이어 매듭-XX을 만들어 지붕을 잊는 모습과 같다. 지붕만드는 것을 지붕 아래 자녀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고도 한다. 지식이란 여러 가지 흩어진 자료(data)와 재료를 엮어서 가공되는 것임을 볼 때 이 상형문자 학(學)자는 과학적인 원리에 근거해서 만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말 지혜로운 글자다. 필요 없는 억새를 묶어 매듭을 만들어 지붕을 잇는 귀한 재료로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도 경험과 지식을 통해 모은 자료를 묶어 정보로 그 정보를 엮어 지식을 만든다. 그 과정을 공부하는 것 곧 학습 과정이라고 한다.
이 글자를 보면 선비들의 사용했던 갓이 연상된다. 갓은 말총을 엮어서 만든 모자인데 사실 조선시대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갓을 조선 시대의 것으로 알고 있다. 검은 말총으로 만든 갓을 조선 시대 선비들이 즐겨 사용했고 그것이 널리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갓은 조선 시대의 선비들의 상징이 되었다. 갓은 배울 학자 모양 그 자체다. 이 배울 학(學)자의 모양을 한 갓을 쓴 모습은 마치 “나는 조선의 선비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갓을 쓴 모습엔 선비로서 몸과 마음가짐인 구용(九容)과 구사(九思)의 자세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담겨있다. 마치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수도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앙을 잊지 않고자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녔던 것과 같은 것이다. 진정한 조선의 선비들은 반듯한 자세로 배움에 임하려는 선비가 지녀야 할 정신을 잊지 않으려고 그들은 외출 시 항상 갓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당시도 오늘날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그냥 멋으로 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이 양반임을 자랑하고자 갓을 썼던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 동기가 어떠하든 상징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성경엔 “너희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아”(신명기6:8)라는, “쉐마”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 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기독교의 역사엔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 희생을 가슴에 간직하려고 했던 수도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엔 갓을 쓰며 의관을 정제하며 군자의 도를 잊지 않으려 했던 선비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이 지녔던 상징은 남아 있다. 그래서 그 메시지가 아직도 전해지는 것이다. 메시지가 형식이 되어 모양만 남기도 하지만 그 형식과 모양이 반복될 때 상징이 된다. 형식과 모양만 남아 있던 상징은 다시 메시지가 되어 살아난다. 상징은 그 자체가 메시지며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실패, 죄인, 죽음을 뜻하는 나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메시지며 복음이었다. 기독교의 수많은 교회의 첨탑에 의미 없는 여인의 장신구로 사용되어져 버린는 십자가도 다시 살아 있는 메시지로 울려 퍼질 날이 곧 올 것이다. 이렇게 “ 나는 교회다” “나는그리스도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