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인문학이 성행한다고 한다.
해안을 찾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책을 읽고 사상가들의 담론을 다시 곱씹기 시작한다. 최근에 인문학의 바람이 불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길을 잃고 스스로 그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아마도 확실히 난 말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우리는 길을 찾지 못한다. 인문학에서 답을 찾기에는 이미 우리는 멀리 왔다. 과거 인문학에 나름 답이 있었다. 덕택에 이미 우리는 변할 만큼 변했다. 발전할 만큼 발전해 버렸다.
더 이상의 인문학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기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서로가 서로를 상쇄할 만큼 상대를 알기 때문이다. 이제 정반합 변증학적 발전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진리가 윤회한다는 사실을 깨달음에 도달했다.
이것도 이미 불가의 석가가 태어나기 수백년 전 솔로몬의 지혜서 ( 성경/전도서)는 그렇게 깨달음을 기록해 놓은 사실에 불과하다. 인간의 이성은 생각만큼 그렇게 발전이 없었다는 말이다. 인간의 이성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삶의 답을 찾는다는 것에는 한계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 특히 선험적인 이성에서 출발해서 해안을 찾아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흔들릴 수 없는 명제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자기의 주변의 실제를 설명해 갔다. 그렇다. 인간은 이성의 반석 위에 문명을 세웠다. 하지만 바벨탑이 무너지듯 이성의 교만함은 결국 자가당착에 빠진다.
예컨대, 논리가 항상 진리는 아니다. 법리에 맞다는 사실 만으로 죄 없는 사람도 죄인이 되기도. 범죄자가 무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린 부인하지 못한다. 사실은 사실이고 논리는 논리이다. 그럼에도 이제껏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 왔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원인과 결과의 뉴턴의 세계관을 흔들어 놓았음에도 우리는 이성이라는 중력권에 아직 살고 있다. 이성의 중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꼭 벗어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밖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이 옳다 해도 뉴톤의 중력권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리가 모든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뿐이다.
www.youtube.com/watch?v=KaOC9danxNo
이성이 인간 존재 자체라고 믿었기에 기독교에서도 이성을 영혼의 좌소라고까지 정의해 왔다. 그래서인지 근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루터처럼 법을 알고 법을 전공한 이들이 많았다. 법리를 아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함에 빠르다. 율법이 어떻고, 언약이 어떻고, 대표성이 어떻고.. 개혁신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소위 언약 신학을 이해하는데 확실히 빠르다. 규정을 중시한다. 약속을 중시한다. 그것을 철저히 믿고 지킴을 중시하다. 틀을 깨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문자에 자신들을 가두어 버렸다. 의문( 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을 (고후2:6) 알면서도 문자의 경계를 넘어가기를 두려워한다. 계속 그 속에 머문다면 근대 기독교라는 종교는 결국 서서히 말라죽어갈 것이다. 이성의 중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인공위성처럼 중력의 경계선의 자리 중력권의 끝자락 궤도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궤도에서는 위성처럼 그렇게 가열하게 쏘아 올리는 몸부림치는 노력이 없어도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 궤도에서는 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나는 예술은 잘 못하지만 예술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한다. 인성만큼이나 심미적 본성은 선험적 본성이다.
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선험적 이성의 존재만큼이나 인간의 본성 아니 신성의 일부로 인간의 형상에 창조와 함께 인간 안에 심겨진 실체다. 어쩌면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 이전에 심미적 존재라는 것이다. 창조주의 만족과 안식도 창조주의 심미적 결과이고 만족에 대한 보상임을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심미적 본성이 신의 속성의 일부임을 부인하지 못하게 한다.
근대적 세계관 안에서 교육받아온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생산이라는 관점으로 너무 쉽게 해석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는 당신의 창조의 날마다 그 끝에 보시기 좋았더라 는 감상과 감탄으로 마무리를 했다는 사실 또한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라는 생산을 통한 필요를 채우는 과정이 아니었다. 비록 인격적 교제를 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도 사귐의 욕구와 결핍을 채우기 위한 과정이라면 신의 완전성을 훼손한다. 그래서 창조는 생산이라는 관점보다 하나님의 자기표현 창작의 행위로 이해함이 내게 더 설득력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리스인들의 만든 신화 속의 신들처럼 인간처럼 실수도 하고 부족함과 결핍이 내재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인간이 가진 것을 서로 서로 나누며 함께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까?
이성 중심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경제와 정치를 통해서 시스템을 만들고 이념을 만들어 주입하고 세뇌하지만 노력만큼 결과는 기대 이하다. 결국 자기주장과 논리로 싸움으로 끝이 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양심과 윤리에 호소를 하지만 그렇게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극복하기가 그렇게 녹녹지 않다. 종교지도자의 타락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되라"고 말하고 싶다.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함께 노래하는 시인이 되라고 권하고 싶다. 인문학이 답할 수 없는 답을 나는 심미적 시인과 같은 사람들이 답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껏 이성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인문 철학이 신학의 도구였다. 이제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과 철학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아름다움의 본질을 추구를 하는 미학에 그 자리를 넘겨줘야 한다. 사실 미학 역시 철학의 일부다. 하지만 미학은 선형적인 논리만을 담지할 수 있는 글만이 아니라 소리와 그림처럼 공감각의 매체를 활용하고 그 기술을 전하는 입체적인 행위 지식이다. 그것으로 아름다움을 만들고 다루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길을 보여 준다. 그래서 미학에 나는 희망을 둔다.
물질을 추구하고 부를 추구하는 사람의 목적은 보다 편리하고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물질의 풍요는 어느 정도 이것들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예컨대 세계 제일의 부자가 자기가 가진 모든 부를 사용해서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을 가질 수 있다고 하자, 그것이 뭘까? 호화로운 집과 평범한 집의 차이는 뭘까? 최고급 차와 평범한 차의 차이는 무얼까?
멋짐이다. 아름다움이다. 생존을 위한 물질 이상의 부귀는 더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차이다. 동화속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아름다움은 어쩌면 관념이다. 아름다움은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누리 수 있는 것이다. 거짓된 희귀한 아름다움에 속아 넘어가기 전에 우리는 모두에게 주어진 진정한 아름다움의 존재를 발견해 알려줘야 한다.
미스코리아와 같은 미인선발대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 인권이나 성을 상품화하는 자리라는 비판도 있지만 나는 다르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나름 미의 기준을 세상에 선포하는 좋은 자리라고 본다. 정치와 부정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여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미의 변화와 발전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 존재를 알리고 대중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The more The better 의 모토 아래 철저한 자본주의 시대의 나락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오늘날 세상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선지자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다.
시인이다.
왕은 결국 권력의 힘을 알고 그 권력과 능력에 도취되어 타락한다.
다윗도 교만과 자기애의 유혹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제사장은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 때문에 재물의 노예가 되기 쉽다.
선지자, 옳은 소리 바른 말을 하지만 남을 찔렀던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찌른다. 정적을 만들고 모살되거나 처형당한다 선지자이신 예수께서도 선지자로서 이와 같은 운명을 감당하셨다.
그래서 이제 감히 모두에게 왕같아라 선지자가 되라 제사장이 되라고 말하기 두렵다.
하지만 모두에게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이 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왕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모두 이들은 이전에 시인들이었다.
시인의 말은 기도였어며 그의 노래는 찬송이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도움이 뒤따랐다. 시인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다.
시인은 가난하고 약하다. 그러나 그의 자존감은 왕에 못지 않고
그의 통찰은 선지자와 같다.
가난해서 하늘로 부터 오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구멍난 천장 아래에서 별들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초가삼간에서도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도 아름다운 빗방울과 빗소리를 즐길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시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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